어느 재벌 회장이 "인재 한명이 만명을 먹여살린다"라는 말을 하고, 그 분 밑의 전직 회장님께서는 평준화 교육 때문에 인재들이 양성이 안된다고 평준화를 해체하고 경쟁위주의 교육을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 말은 수없이 많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인재들을 발굴하고 기회를 제공하기 귀찮고, 돈도 많이 들어서, 또는 자신들의 현재 지위를 위협할까봐 하는 말은 아닌지 곱씹어 봐야 할 겁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국난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 당시에 의심많고 협량하기 이를데 없던 선조임금과 그 밑에서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자기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자기들 말만 잘 들었던 사람들만 관직에 등용했던 고위관료들에 의해 제대로된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던 끝에. 임금과 고위관료들은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군을 막지 못하고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을 가고 명나라에 굴욕적 외교로 명나라 군대를 이땅에 끌어들였으나, 외국군대의 수탈이 극에 달해 여우를 피하려다 늑대를 만난 격이었던지라, 결국은 분노한 민중의 의병봉기와 몇 몇 뛰어난 장수들의 살신성인으로 7년이나 전쟁을 겪은 후에야 겨우 겨우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무능한 정부와 당시 지도층들에 대한 백성과 민중의 후회와 한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시중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합니다.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끝냈으리라." [참조 1]
모두 처음들어보거나 낯설게 들리는 이름들 일겁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당시 민중과 백성의 가없는 인재에 대한 '갈구'와 함께 이러한 뛰어난 인재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저런 이유로 오히려 억압하고 탄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 소인배들에 대한 한탄과 원한이 담겨져 있던 것이지요.
최근 인기영화 중 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실제 사건인 정여립 사건, 이몽학의 난을 배경으로 극적 재구성한 만화를 다시 영화화 한 것인데, 정여립 사건으로 수없이 많은 동인 세력들이 죽어나가면서 그나마 활동했던 몇 몇 인재들이 크게 죽어나갔고,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간에 있었던 이몽학의 난으로 인해 실제로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등 의병장들이 선조와 집권세력의 의심을 받아 결국 김덕령 장군은 자신이 죄없음을 알리기 위해 쇠줄을 세 번 끊고 세번 담장을 넘었다 들어왔다 하면서 자신이 힘이 없어 잡힌 것이 아님을 보이면서 결백을 주장했으나 지독한 고문끝에 장독으로 옥사하고, 최담령은 처형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순신 장군등 뛰어난 무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까지 끝없는 의심의 눈초리와 위협을 가하면서 인재들은 국난에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겨우 겨우 나라를 지켜내고는 모두 죽어나가거나, 아니면 깊은 산으로 아무도 모르는 시중으로 몸을 숨기거나 하면서 나라의 인재가 씨가 말랐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 이후 조선의 인재들은 세상에 나오길 꺼려하면서 병자호란도 겪게되고, 결국은 일본에 국권을 넘기게 되는 국치를 맞게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재가 있었으나 쓰지못하고 오히려 죽였던 것이 벌써 500년 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500년 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요?
어느 재벌 회장의 말처럼 만명을 먹여살릴 인재 한명을 위해 오히려 나머지 만명의 인재 중 정말로 뛰어난 인재는 모른체 하면서 외국 유수의 학교에서 학위를 따고온 외국물 먹은 사람들만 인재랍시고 불러와서 써먹다가 자기들 입맛에 맛지 않으면 또 내치는건 아닌지요?
그리고, 사교육 잘 받아 온갖 학력평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시험 잘치는 암기형 인재들만 좋은 대학가서 간판을 따고 이들에게만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창의적 인재들이 될 수 있는 비암기형 인재들은 그냥 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최근 정치, 경제, 교육 분야에서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자꾸 거론하곤 합니다만, 정작 인재를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하거나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인재는 널리고 널려있습니다만, 백락이 천리마를 알아보듯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리더를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500년 전 조선의 무능한 위정자들로 인해 인재가 죽어나가고 활용을 못했다면,뭔가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텐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무능한 위정자들로 인해 우리 주변의 수없이 좋은 인재들이 활용되지 못하고 그냥 묻혀나가는 것에 대해 통탄해 마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인재를 기르는 것 뿐 아니라 어떻게 인재를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끝냈으리라."
강증산(姜甑山·1871~1909)의 어록을 정리해 놓은 '대순전경(大巡典經)'에 나오는 말이다. 강증산에 의하여 여덟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고 평가받은 송구봉은 당시 유가(儒家)에서 가장 내공이 높았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당대 제도권에서는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지만, 민초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평가에 의하면 송구봉은 강단(講壇)이 아닌 강호유학(江湖儒學)의 최고봉으로 여겨져 왔다. 당대의 석학 이율곡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지는 송구봉은 여러 가지 신비한 야사가 많다.
하지만 능력에도 불구하고 출신상의 비천한 신분이 문제가 되어 당시 역사무대에서 활동이 봉쇄되었던 인물이다. 진묵은 임진왜란 때 서산(西山)대사와는 달리 서방산(西方山)에 은둔하면서 끝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고승이다. 하지만 민초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신이(神異)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 재야에서는 고려 말의 나옹(懶翁)대사와 함께 가장 도력이 높았던 고승으로 진묵을 꼽는다. 3일이면 임진왜란을 끝냈을 것이라고 보는 최풍헌은 도가의 인물이다. 여기서 '풍헌(風憲)'은 이름이 아니다. 직책을 가리킨다. 조선조에 행정조직의 가장 말단에 있었던 직책이 풍헌이다.
요즘으로 치면 시골 동네 '이장' 정도 되는 자리이다. 증산이 최고의 인물로 꼽은 최풍헌은 가장 보잘것없고 역사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오직 민중들의 구전에만 내려온다. 야사에 의하면 평양으로 피란 간 선조에게 나아가 '병권을 3일만 허락해 주면 왜병을 물리치겠다'고 요청했지만,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증산이 유독 강호의 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임금인 선조를 비롯하여 주변을 싸고 있던 조정의 관료들이 너무 무능하지 않았느냐는 대다수 민초들의 비판과 경멸을 반영한 것이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되는 국정 혼란을 보면서 이번 정부는 왜 이렇게도 무능한가?이명박대통령 주변에는 그렇게도 인물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 신선은 모습을 감추고 살지만 가끔 이렇게 인간세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하고는 행동하는 것이 확연히다른 법이죠. 이런사람은 때로는 모자란척 때로는 미친척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범인들이 그 인물의 깊이를 알아보기는 힘듭니다.하지만 앞일을 예지하는 능력이나 위급한 상황에 닥쳐서는 그 일을 해결하는 능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나답니다..이 일화도 그런 경우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뛰어난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이런 분들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이라도 가져야 한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나의 기존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기존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다가서야 합니다. 그 때 도의 세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도의 세계를 공부한 분들은 최풍헌의 도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답니다...앞으로 최풍헌에 대해서는 더 알아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최 풍헌은 지난 임진란 때 전라도 고흥사람이다. 풍헌이 밤 낮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동리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고 툭하면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거니 모두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류 훈장만은 그런 풍헌을 그 때마다 타이를 뿐이니, 이는 풍헌이 일에 임하면 명민하고
지혜가 뛰어나므로 일찍부터 범상치 않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한번은 고을 현령이 풍헌을 못마땅히 여겨 파면할 구실을 찾으려고 고을 호구대장과 토지대장을 주며 몇 달이 걸릴 일을 "보름 안에 조사해 오라"하고 명하니 풍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가
기한이 차매 뜻밖에 한 사람도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조사하여 올리거늘 조사한 날이 모두 한날한시인데다 수결까지 쓰여 있어 현령이 크게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라.
몇 달 후에 '왜병이 침입하리라'는 풍설이 널리 퍼져 민심이 크게 소동하거늘 류 훈장이 풍헌에게 피난할 일 을 부탁하되 풍헌은 '알지 못한다.'며 수차 사양할 뿐이더니하루는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그대의가산과 전답을 다 팔아서 나에게 맡기라'하매 훈장이 풍헌을 믿고 그대로 따르거늘 풍헌이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히 지내다가 갑자기 한 달 동안 사라져 보이지 않으니라.
훈장은 믿는 바가 있어 모르는 체하며 지내는데 하루는 '풍헌이 사망했다.'는 부고가 이르거늘 훈장이 크게 놀라 풍헌의 집에 찾아간즉 풍헌의 막내아들이 건을 쓰고 곡하며 훈장을 맞으매 "어떻게 돌아가셨냐?"하고 물으니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구정물 통에 머리가 박혀서 돌아가셨다." 하므로 시신을 살펴보니 과연최풍헌이라. 훈장이 "유언이 있느나?"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솔과 더불어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게 하여 지래산 아무 골짜기에 장사지내라 하였습니다."하는지라.
훈장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의논하니 모두 곧이듣지 않고 막내아들 하나만 뜻을 따르거늘 사흘 뒤에 운상하여 지래산 속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위에서'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오라' 는 소리가 있어 바라보니 곧 풍헌이라. 이에 상여를 버리고 올라가니 그것에 가옥을 지어 놓고 양식을 풍부히 마련해 두었더라.
얼마 후에 밤이 되어 살던 마을 쪽을 바라보니 불빛이 환하거늘 풍헌이 말하기를 '이는 왜병이 침입하여 온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이라' 하매 훈장이 더욱 탄복하니라.그런데 그 골짜기 위에서 본 최 풍 헌의 얼굴이 본래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하니라.
참조3: [구봉 송익필]
구봉은 1534년 여산 송씨,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라는 싯구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20대에 이미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는 서로의 학문적 경지를 흠모해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일찍이 교육자의 길에 들어, 후일 예학의 대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는 사계 김장생, 수몽 정엽, 기옹 정홍명 같은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그러나 구봉은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구봉의 외 증조모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켰고,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불린 이 사건은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송구봉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노(私奴:남자 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송구봉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다. 번개가 치는 듯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무릎이 꺾여 절을 하고만 사연
당시 조정에서 판서의 직위에 있던 홍가신은 송구봉을 흠모하여 자주 서신을 보내 학문과 업무에 관한 대소사에 많은 자문을 구했다. 이런 홍가신에게 경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 경신은 판서의 직위에까지 오른 형이 한낱 종의 자손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겨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 하나를 건넸다. "너,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거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었다. "종놈의 새끼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거라."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새끼가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송구봉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송구봉을 욕보이겠다고 기세 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까막까막해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까막까막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하나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 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 임금을 바라보지 않는 신하
구봉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은 다가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송구봉을 끊임없이 천거했다고 한다. 당시 율곡은 성우계와 함께 송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모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마침내 그를 만나보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송구봉과 대면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 송구봉은 눈을 감고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이에 할 수 없이 눈을 뜨니, 선조는 그만 그의 눈빛에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송구봉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꼭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송구봉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송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그가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죽고 만다. 하지만 율곡은 쉽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율곡은 앞으로 일어날 전란을 예상하고 임금이 피난 가는 길목에 화석정을 세워 갈 길을 밝혀, 죽어서도 군주를 구한다. 이러했던 율곡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이에 율곡이 송구봉을 찾아가 앞날을 준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 송익필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했었다.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하고도 십여년 전, 조선 14대 선조대왕 시절의 이야기예요. 소년장사 김덕령이 한참 씨름판을 휩쓸던 무렵쯤이나 될까요. 그때 한양에는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 선생이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요. 이율곡은 학문은 물론이고, 별자리를 보는 눈이 남달랐어요.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세상일을 두루 헤아리곤 했지요. 하늘의 별 가운데는 율곡의 별도 있었어요. 동쪽 하늘 복판에 떠서 북두칠성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었지요.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동쪽 하늘 외진 곳에 숨어서 홀로 그윽하게 빛나는 별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율곡은 그 별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저 별도 조선의 인물이 분명한데, 그 임자가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선 천지의 이름난 사람 가운데 그 별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어요. '숨어 살고 있는 인재가 분명해. 내가 한번 찾아봐야겠어.' 율곡은 벼르던 끝에 어느 날 그 별의 임자를 찾아 여행을 떠났어요. 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시골 선비처럼 조촐히 차려입은 채로 하인도 없이 말을 타고서 길을 나섰습니다.
율곡은 별이 방향을 따라서 정처없이 움직였어요. 밤마다 별을 보면서 나아갈 방향을 가늠했지요. 그러기를 여러 날, 율곡은 별빛을 보면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별의 임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어요. 주막집에서 하루를 묵은 이율곡은 여느 날처럼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어요. 아직 동이 터오르기 전이라서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요. 율곡이 터덜터덜 말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소를 타고 오는 게 보였어요. 허름한 베옷에 삿갓을 쓴 모습이 영락없이 촌사람의 행색이었지요. '나만큼이나 부지런한 사람이 또 있군.'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무심코 그 사람을 바라본 율곡은 흠칫했어요. 삿갓 아래에서 무언가 이상한 빛을 본 것 같았어요. 율곡은 말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요. 저 잠깐 말씀을…" 그러자 그 사람이 소를 멈추고 삿갓을 들어 율곡을 바라보았어요.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사람 눈에서 빛이 나오는데 마치 화살이 몸에 와 닿는 것 같았어요. 몸가짐이 무겁기로 소문난 율곡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칫했지요. 보통사람 같았으면 말에서 툭 떨어졌을 거예요. 율곡은 한눈에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 탄 사람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실례합니다. 저는 누군가 하면…"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 탄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어요. "허허, 율곡선생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마중 나오는 길이올시다." "아니 어떻게 그걸!" "자, 다른 얘기는 뒤에 하고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그 사람은 태연히 소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향했습니다.
율곡이 소 탄 사람을 따라서 당도한 곳은 산 속에 있는 외딴 초가집이었어요. 기둥을 툭 치면 폭삭 가라앉을 것 같은 초라한 집이었지요.방안에 둘이 마주앉자 율곡이 서둘러 입을 열었어요. "제가 둔해서 선생을 이제서야 뵙게 되었습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선생이라니요. 보잘것없는 촌사람인 걸요. 저는 송구봉이라고 합니다." '송구봉, 송구봉……' 언제 들어본 듯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한 낯선 이름이었어요. "이렇게 산 속에서 사는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허허, 뭐 사연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번잡한 세상이 싫어서 강산을 벗삼아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이율곡이 아니었지요. 율곡은 한번 그 사람을 떠볼 겸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참으로 태평하게 사시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세상이 태평하다고들 합니다만……." "태평해 보일수록 위급한 법이지요." 그 말에 율곡이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제 뜻과 같습니다. 나라가 태평할수록 위급한 일을 대비해야 하는 법인데 조정에서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머지 않아 바다 건너 왜구가 쳐들어올텐데 말입니다." 그 말에 율곡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저도 그 비슷한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만…." "허허, 그러시겠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걸 모를 지경이었어요. 아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밖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지요. 그 동안 율곡의 가슴은 내내 쿵쿵 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뜻이 잘 맞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거든요. 두 사람은 서로 의기가 투합해서 아주 친해졌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허허, 저 또한 같은 마음이올시다."
초야에 묻힌 까닭
그 후로 이율곡과 송구봉은 틈틈이 만나서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주로 율곡이 틈을 내어 구봉을 찾아갔지요. 구봉과 만나고 돌아갈 때마다 율곡의 마음은 뿌듯하게 차올랐습니다. 거듭 만나다 보니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격식을 털어버리고 편안한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율곡이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구봉, 우리 이미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으니 서로 말을 트고 지내면 어떻겠소?" 그러자 송구봉이 너털웃음과 함께 말을 받았습니다. "허허, 듣던 중 반가운 말일세그려." "암, 좋은 일이고말고." 한바탕 웃음을 웃고 난 후, 율곡이 정색을 하고 구봉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렇게 친구가 된 이상 서로 뭘 숨기겠는가. 산 속에 들어와 사는 사연을 오늘은 좀 말해주게나." "그래. 친구 사이에 숨길 일이 뭐 있겠는가." 송구봉은 옛일을 생각하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이야. 비천한 종의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일세." 송구봉의 할아버지는 어엿한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질 못했어요. 그는 할아버지가 첩으로 삼은 몸종의 소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첩의 자손을 '서얼'이라고 해서 크게 차별했어요. 서얼은 벼슬을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어요. 종이 주인을 부르듯이 '대감마님'이라고 불러야 했지요. 송구봉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 아들인 송구봉이 바로 그런 신세였답니다. 어린 시절에 송구봉은 아주 영특한 아이였어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였지요. 특히 구봉은 유난히 눈빛이 밝고 강해서 어른들도 눈을 마주치면 외면할 정도였습니다. 구봉의 아버지는 글을 가르쳐봐야 쓸모가 없는 줄 면서도 아들의 고집에 못 이겨 구봉을 서당에 보냈습니다. 양반 도령들 사이에 끼어든 구봉은 단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지요. 서당 훈장조차도 그의 송곳 같은 질문에 쩔쩔맬 정도였어요. 그런데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은 구봉과 어울리기를 꺼려했어요. 뻔히 보고도 못본 척 딴전을 피우기 일쑤였지요. 한동안은 등 뒤에서 소근소근 손가락질을 하더니, 점차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송구봉이 참다못해 눈을 부릅뜨고 도령들에게 소리쳤어요.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나를 따돌리는 거냐?" 그러자 도령 가운데 하나가 내뱉듯이 말했어요. "더러운 종놈의 자식이 감히 큰소리야!" 그 말에 구봉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 동안 자신이 따돌림을 당한 이유를 환히 깨달았지요. 그는 눈에 불이 일어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구봉은 그 도령의 멱살을 잡아서 마당에 패대기쳤어요. 도령은 개구리처럼 나자빠져서 한참 동안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구봉은 훈장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을 말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훈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으로 뜻밖이었어요. "쯧, 천한 녀석이 끝내 말썽이군. 서당에 와서 공부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분수도 모르고 이게 웬 행패란 말이냐!" 그 말에 구봉은 아까보다 더 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 동안 존경심을 가지고 지성껏 모셔온 스승이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다니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만 떨구던 소년 송구봉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서당을 떠나갔습니다.송구봉은 그날로 부모님과 하직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어요. 미친 사람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지요.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은 것이었어요. 이야기를 끝낸 송구봉은 이율곡을 건너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어때, 내 근본을 알고 보니 친구로 지내기로 한 게 후회되지 않는가?" 율곡이 얼른 손사래를 쳤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저 내가 양반이란 게 부끄러울 따름이네. 도대체 양반이 무어고 종은 또 무어란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야." 율곡은 구봉의 손을 잡고서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두고 보게. 내가 꼭 자네를 출세시키겠어." "허허, 공연한 생각 말게. 자네만 욕을 볼 뿐이야."
율곡의 아들은 쌀장수?
율곡이 구봉과 왕래를 한 지 서너 달쯤 됐을 때였어요. 율곡이 미천한 사람과 사귀는 것을 눈치챈 아들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처럼 귀하신 분이 어찌 천한 사람과 어울리십니까?" "모르는 소리! 구봉 선생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시다." "아버님, 남이 알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입니까?" "남의 이목이 그리 두렵더란 말이냐. 긴 얘기 할 것 없이 구봉 선생을 한번 만나보거라. 아마 내일 우리집을 찾으실 게다." 그 말을 들은 율곡의 아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구봉이 찾아오면 망신을 줘서 아버지와 못 만나게 해야겠다고 별렀지요. 다음날 율곡은 자리를 비키고 아들이 사랑방을 지키고 있는데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어요. "이리 오너라. 아무도 없느냐?" 종이 대문을 열자 손님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소리쳤습니다. "율곡. 나 구봉일세." 그러자 율곡의 아들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 먹고서 "뉘시라구요?" 하면서 방문을 훌쩍 열어젖혔어요. 아뿔싸! 송구봉을 보는 순간 율곡의 아들은 그만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당당한 풍모에 휘황한 눈빛.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가 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율곡은 안에 계신가?" "잠깐 밖에 나가셨습니다. 올라가서 기다리시지요." 그러자 구봉이 율곡의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서 엉뚱한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 요즘 쌀값이 한 섬에 얼마나 가는고?" "글쎄요. 잘 모르는 일입니다만…" "알았네." 송구봉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날 구봉이 율곡과 담소를 나누고 돌아간 뒤, 율곡이 아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구봉 선생을 만나 보니 어떻더냐?" "그런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버선발로 땅에 내려가 절을 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그래, 달리 묻는 말씀이 없더냐?" "무슨 까닭인지, 쌀값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그건 네 인품이 쌀장수 할 만큼밖에 안 된다는 뜻이야. 앞으로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할게다." 그 말에 율곡의 아들은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습니다. 좁은 소견을 고치겠다고 다짐했음은 물론이지요.
축지법을 쓰는 소
율곡은 구봉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록 학문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대화만 나눌 게 아니라, 우리 생각을 책으로 엮으면 어떻겠는가?" "흠, 뜻이야 좋지만 어디 쓸 곳이 있겠나?" "남이 알아주는 거야 상관할 바 아니지." "허허,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두 사람은 자기 생각을 글로 써온 다음 서로 바꾸어 보면서 글을 다듬었어요. 두 사람의 글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뜻이 잘 맞았지요. 특히 율곡이 보기에 구봉의 글에는 글자 하나 고칠 게 없었습니다. 구봉은 가끔 율곡의 글에서 고칠 곳을 짚어주었는데, 다시 보면 과연 그 말이 맞았습니다. 그때마다 율곡은 구봉의 깊은 식견에 탄복했습니다. 하루는 서로 글을 바꾸어 읽는데, 구봉이 유난히 여러 곳을 지적하면서 말했어요. "허허, 이거 당대의 대학자가 우리 집 소보다 둔하지 않은가!" 그러자 머쓱해진 율곡이 약간 성을 냈어요. "이거 말이 좀 심하군. 나를 소한테 비기다니 말이야." "그랬는가? 내가 잘못했네 그려." 두 사람은 마주보며 껄껄껄 웃었습니다. 그 날 구봉은 정색을 하면서 율곡에게 말했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네. 편지를 전할 곳이 있는데 자네가 대신 수고해주게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일세." 율곡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지. 어디 사는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가?" "저 소를 타고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구봉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소를 가리켰습니다. "아직 소는 타 본 적이 없는걸." "아마 자네 말보다 나을 걸세. 그건 그렇고, 길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하나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을 꼭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지만, 구봉을 믿는 율곡은 더 묻지 않았어요. 편지를 소매에 넣고 소에 올라탔지요. 처음엔 영 마뜩하지 않았는데, 타고 보니 정말로 편안하기가 말보다 나았어요. 게다가 소가 느릿느릿 걷는데도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지 않겠어요. 십 리, 이십 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요. '어허, 이 소가 축지법을 쓰는군. 구봉이 나더러 소보다 둔하다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어.'
이상한 젊은이와 노인들
소는 강원도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길을 잡아 높고 아름다운 산에 이르렀어요. 수려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마다 파릇파릇 푸른 싹이 트고 봄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어요. '여기는 금강산이 아닌가!' 그래요. 구봉의 소가 찾아간 곳은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었습니다. 소는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길이 좁고 험했지만 소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어요. 한참을 가던 소는 이번엔 벼랑길로 접어들었어요. 보기만 해도 눈이 아찔한 깎아지른 벼랑이었지요. 길이 아주 좁고 험해서 사람 한 명이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어요. 그렇지만 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갔어요. 한참을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일꼬? 이 험한 길에 말을 타고 다니다니 신기한 일이야.'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 길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서로 마주치고 보니 참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길이 워낙 좁아서 서로 비켜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뒤돌아갈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소와 말도 서로 멀뚱멀뚱 바라맘 보았어요. '어허, 이 일을 어쩐담?' 율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 젊은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어요. 그는 말의 다리를 한 손에 두 개씩 모아 쥐더니 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서 한쪽으로 바짝 비켜섰습니다. 덕분에 율곡은 소를 탄 채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지요. '참 이상한 젊은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얼마쯤 길을 가던 율곡은 속으로 '아차!' 했어요. 젊은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 구봉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거예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젊은이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어요. 율곡은 급히 손나팔을 만들어 젊은이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나 좀 잠깐 보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말을 멈추고는 아까처럼 말을 들어올려 방향을 바꾸었어요. 그리고는 벼랑길을 타고서 율곡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하고 어디 좀 같이 가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율곡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주 입이 무거운 젊은이였어요. 두 사람이 소와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한참 올라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쏴쏴쏴' 하고 들렸어요. 절벽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율곡은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지요. 한쪽에 폭포수가 은빛 물살을 휘날리며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양쪽 등성이에는 산철쭉 무리가 푸른 새싹들과 어울려 망울망울 꽃을 피워내고 있었어요. 폭포 옆쪽에 넓다란 바위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복숭아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꽃 그림자 아래 너른 바위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넷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어요. 율곡과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그리로 다가갔지요. 하지만 노인들은 바둑 두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어요. 율곡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어요. "문안 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한 노인이 돌아보면서 말을 던졌어요. "그래, 속세 사람이 여기는 웬 일인고?" 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어요.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다른 노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 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어요. 문곡성의 기운을 띠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하지요. 다른 노인이 말했어요.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장차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 그러자 노인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어요. "그거야 하늘의 뜻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문곡의 부탁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면 몇 달 안에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8년을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의 전란은 피할 수 없어." 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율곡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나라에 장차 왜란이 나서 7년이나 전쟁을 하게 된단 말인가.' 그때 다시 한 노인들이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시켜서 7년 만에 왜란을 끝내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문득 말고삐를 붙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옳지! 저기 인재가 있구먼!" 노인들은 종이를 꺼내더니 머리를 맞댄 채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리 접고 저리 접기를 한참을 하더니 마침내 완성이 됐는지 젊은이를 불러서 주었어요. "여보게 젊은이. 이걸 받게." 노인들이 만든 것은 물에 띄우는 배였어요. 그런데 그 모양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용처럼 생긴 머리가 앞쪽에 솟아 있고 거북등 모양의 배 지붕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어요. 배 옆구리에는 여러 개의 노가 삐쳐 나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거북선의 모형이었습니다. 지금 이 배를 받아든 젊은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래요. 그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거북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말이에요.
임금 앞에 나아간 송구봉
율곡은 금강산에 다녀온 후 큰 시름에 잠겼어요. 하루 빨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율곡은 선조 임금에게 기나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송구봉의 높은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자세히 쓰고 나서 구봉에게 벼슬을 내려 큰 일을 맡겨야 한다고 호소했지요. 그 상소문을 읽고 감동한 선조는 송구봉을 불러들이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임금이 송구봉을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어요. 신분이 천한 사람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요. 구봉을 추천한 율곡에게도 공격이 쏟아졌지요. 하지만 선조 임금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송구봉은 임금을 만나기 위해 대궐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양쪽에 신하들이 늘어선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임금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임금님 계신 곳에 들어올 때부터 송구봉은 눈을 지긋이 내려감고서 뜨지를 않았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열굴을 들었을 때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요. 신하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임금이 말했습니다. "여봐라. 그대가 송구봉인고?" "그렇습니다." "한데 괴이한 일이로다. 어찌하여 눈을 감고 있단 말인고? 눈을 뜨고 이쪽을 보라."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어요. "전하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옵니다." "놀라다니. 어서 눈을 뜨거라." 그 말에 송구봉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순간 그 눈빛이 얼마나 휘황찬란하던지 임금은 물론 신하들이 모두 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젖히면서 목을 움츠렸어요. 선조 임금은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고 송구봉에게 나라 형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습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못된 벼슬아치들 때문에 임금의 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왜적이 조선을 넘보고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당파싸움을 뿌리뽑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임금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 선조의 눈이 둥그래졌어요. 당파를 뿌리뽑으라는 말에는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요. 잠시 후 신하들이 앞다투어 송구봉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하, 저자가 지금 태평한 나라에 쓸데없는 풍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 무엄한 자를 지금 당장 내쫓으십시오." "전하, 내쫓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당장 옥에 가두고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선조 임금은 신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는 데 넌더리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송구봉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지요. 그러나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구봉을 벌하라고 하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곡이 나서서 아뢰었습니다. "전하, 송구봉의 말이 맞습니다. 당파를 누르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이율곡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소란은 도무지 끝이 없었지요. 임금은 그만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았어요. "다들 그만두시오. 내 오늘 일은 다 없었던 것으로 하리다."
율곡의 죽음과 임진왜란
송구봉에게 나라 일을 맡기려던 뜻은 물거품이 되자, 율곡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자 구봉이 말했습니다. "이게 다 하늘의 운수인 걸 어쩌겠는가. 자네라도 나서서 힘쓰도록 하게나."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혼자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서…. 게다가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큰일은 큰일이로군." 이율곡은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임금에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십만 명의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십만양병설'을 열성을 다해서 외쳤지요.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에 밀려 끝내 실현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이율곡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말을 남긴 채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율곡이 죽자 송구봉은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통곡하고 나서 살던 집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일본은 수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지요. 임금과 신하들은 그제서야 이율곡과 송구봉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왜군은 조선의 인재들을 잡아죽이려고 눈이 벌갰어요. 그들은 송구봉이 제갈공명만큼이나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구봉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구봉이 나라 일을 맡으면 큰일이기 때문이었지요. 왜장은 칼을 잘 부리는 자객들을 모아놓고 조선 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송구봉을 찾아 없애라고 명령했어요. 명을 받은 자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그때 구봉은 금강산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게 일이었지요. 그날도 시름에 잠겨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양손에 칼을 든 사람 둘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왜장이 보낸 칼잡이였어요. 칼잡이들은 한꺼번에 몸을 날리며 구봉에게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당할 송구봉이 아니었지요. 재빨리 칼을 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손으로 두 칼잡이의 가슴을 잡아서 멀리 내던졌어요. 칼잡이들은 저만큼 나가떨어져 버렸습니다. 왜적은 송구봉을 없애는 데 실패했지만, 염려했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다 끝나도록 구봉에게는 나라 일이 맡겨지지 않았지요. 김덕령 같은 영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조정에서 송구봉을 불러들일 리 있겠어요. 그러는 사이에 이 나라는 왜적에게 짓밟혀서 온통 쑥밭이 되고 말았어요. 백성들이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섰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요. 그러기를 장장 7년, 거북선을 거느린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 비로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혼쭐난 이여송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조선 땅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왔습니다. 명나라 군사는 왜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잡아가기도 했지요. 왜란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아주 음흉한 계략을 품고 있었어요. 조선의 수려한 강산과 기름진 땅을 보고는 이번 기회에 조선 땅을 차지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이여송과 명나라 군대를 위해 평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여송은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조선의 신하들이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한껏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이제 곧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때였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펼쳐지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웬 소년이 소를 탄 채 성큼성큼 들어왔어요. 소년은 눈이 휘둥그래진 군사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대청마루를 향하여 카랑카랑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스승께서 보고자 하시니 이여송 장군은 속히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유유히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섰어요. 명나라 군사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요. 대청마루에 있던 조정 신하들은 하도 기가 막혀 실실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허허, 맹랑한 놈이로고. 이거 재미있는 놀잇감이 생겼군. 내가 한손으로 잡아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지." 그 말과 함께 이여송은 훌쩍 말에 올라 소년의 뒤를 쫓기 시작했어요. 수백명의 호위병이 그 뒤를 따랐지요. 이여송은 한달음에 소년을 잡으려고 채찍을 휘둘렀어요. 말은 비호처럼 달려나갔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분명히 소년이 탄 소가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잡힐 듯 잡힐 듯 영 잡히지를 않는 것이었어요. 이제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몇 발자국 앞에 나가 있었지요. 그 이상한 경주는 한나절이나 계속됐어요. 수백리 길이 훌쩍 지나갔지요. 소년은 수려한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이르러서야 소를 멈췄어요. 명나라 군사들이 집을 에워쌌습니다. 소년은 방을 향하여 말했어요. "스승님, 이여송 장군을 모셔 왔습니다." 그러자 방문은 열리지 않고 말소리만 들려왔어요. "수고했다. 방으로 모시거라." 소년은 막 말에서 내려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여송에게 짧게 말했어요. "들어가시지요."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세 사람이 들어앉으면 꽉 찰 것 같은 비좁은 방이었어요. 방안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다가 나직하고 위엄 있는 소리로 이여송을 맞이했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거기 앉으시오." 노인은 밖에 있는 소년에게 다른 군사들을 모두 방으로 들이라고 말했어요. 그 좁은 방에 수백명의 군사를 들이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들어와 앉으면 그 옆에 새로 자리가 생겨났어요. 그렇게 해서 수백명 군사가 모두 방안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자, 그 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이다. 한잔씩 드시구려." 노인은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이여송의 잔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술을 한 잔씩 돌리는데, 아무리 따라도 술은 줄지를 않았어요. 이여송과 군사들은 하도 신기해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지요. 술이 다 돌고 나자 노인이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딴마음일랑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 그 말과 함께 노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여송을 쏘아보았습니다. 노인의 눈에서는 번개와도 같고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어요. 이여송은 그만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습니다. 이여송은 자기 마음을 훤히 꿰뚫는 이 노인한테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어요.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어요. '아이쿠. 조선을 넘보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구나.' 결국 이여송은 조선 땅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버린 채 군사들을 이끌고서 중국으로 되돌아갔답니다. 노인이 아니었으면 또 한번 큰일이 터질 뻔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예요. 이여송을 꼼짝 못하게 한 그 노인이 누군지는 벌써 눈치챘겠지요? 그래요. 금강산에 숨어살고 있던 송구봉이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 사람 가운데 송구봉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선이 돼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만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지요. 오늘날까지도 시골의 노인들은 송구봉에 관한 전설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답니다. "그때 그 어른이 나라 일을 맡았으면 그까짓 왜놈들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의 본관은 온양으로 조선조 중종 즉위년(1506년)에 정순붕(1484~1548)과 완산 이씨 사이에 6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기반 삼아 우의정까지 출세했던‘을사 삼간(三奸)’중 한 명이고, 모친은 세종의 장형(長兄)인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다.
정북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아주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음률, 의약, 수학, 한문, 복서(卜筮) 등 배우지 않아도 어릴 적부터 하늘아래 있는 온갖 학문에 뛰어났으며,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장유의「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中에서 ).
또한 그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 말도 배우지 않고도 듣는 대로 통했다. 14세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중국어와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대만) 언어를 구사하여 그곳에 온 외국사절에게『주역』,『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등 어려운 경전(經典)들을 쉽게 가르쳐주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이 해(1520년)에 부친 정순붕은‘전주 부윤’에 있다가 면직되는데, 이듬해에는‘종놈처럼 아첨한다’고 하여 관작까지 삭탈 당한다.
1520년부터 1537년까지 17년간, 정북창의 집안은 부친의 면직과 관작 삭탈로 의식이 궁색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진다. 이때가 정북창의 나이 15세에서 32세에 해당되는데, 그는 이 기간에 과거시험 공부를 단념하고 유학사회에선 잡학으로 치부하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의 학문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복직된 1537년에 그는 사마시(생원, 진사시험)에 급제한다. 그러나 사마시는 예비시험격인 소과(小科)여서 관직을 받으려면 대과(大科)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치르지 않는다.
그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급제한 것은 본인의 의도보다는 부모의 강압적 권유와 관직을 얻은 비슷한 연배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사마시 급제이후 과거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유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에 힘써서, 고관(高官) 벼슬에 나가지 말고 낮은 지위에 머물 것이다. 혼인은 고귀한 가문에 의탁하지 말 것이며, 때가 화(和)하면 벼슬을 하되, 세상이 어그러지면 임야(林野)에 물러가 힘써 땅을 갈아 자급(自給)할 것이다.”(북창 정렴의「온성세고」유훈中에서)
정북창의 이런 견해는 유교적 처세와도 상통하지만, 17년간의 궁핍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부귀와 물욕에 빠지지 않고 주체성을 지키려는 자세로 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조정 출사와 은퇴
정북창이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인재로 추천 발탁하여 장악원(掌樂院: 음악,무용 담당청) ‘주부’겸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책력 담당청)과 혜민서(惠民署: 의약,치료 담당청) ‘교수’직을 준다. 그는 또한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藥理)에도 정통하여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들이 북창을‘명의’라고 천거할 정도였고, 인종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가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상한 재주로 인해 당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방 병풍 위에‘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았고 3정승 중 한 명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던 인종은 안타깝게도 9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정왕후(13대 명종의 모후)에 의해 독살됨으로써정북창은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없어진다.
조정 관직을 역임하고 포천 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정북창은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掛蘿里, 현재의 양주시 산북동 일대)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그토록 재주가 뛰어났던 그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명종실록』,『 조선고금 명현전』,『 용주선생유고』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 정순붕은 17년간의 경제적, 정신적 고초를 벗어나고자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운다.
1545년(명종1년),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작당하여 당시 권력의 횡포를 휘두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세력에 붙어 대윤(大尹;인종 외척)과 청렴한 사림파 인물을 모함 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때 정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 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정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한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인『용주선생유고』에는“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무함(誣陷)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부친은 비록 불의했으나, 정북창의 효심어린 처신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정북창은 동네에 애경상문(哀慶喪問)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불의에 대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북창은 학식도 많고 명성이 있었기에 자신이 앉아있으면 부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으니,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했다.
을사사화의 다음 해(1546년) 정북창은 산속으로 은둔하는데, 출세욕에 빠진 부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 천륜파괴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북창은 산속에서 도학, 역학, 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고 신선술을 연마하며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그는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만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라는 별호도 이때 생긴 것이라 한다.
도를 닦으며 은둔생활
정북창은 풍채가 학과 같았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품 또한 맑고 깨끗했으며, 친구를사귈 때에도 인정(人情)과 도(道)에 바탕을 둔 도반(道伴)으로서 깊이 있는 벗을 사귀었다.
그는 선도(仙道)에 함께 몰두하며 뜻이 통했던 동생 정작과 박지화 그리고 불승(佛僧)들과 만나서 산수를 즐기며, 유(儒), 불(佛), 선(仙)에 대해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이들과 정북창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고, 상대방의 사상을 인정해 주었던 진정한 도반(道伴)들이었다. 박지화(1513~1592)는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인데 후에 정작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정북창은 시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정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도인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긴다. 화담 서경덕은 어릴 적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 천(天)’자에 문득 크게 깨우치고는‘천(天)’자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글자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소강절의『황극경세서』에 나오는‘우주일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도인이었다.
선도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 병은 특별한 증세없이 심신이 고달플 때 생긴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울화병’으로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의『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대하고, 코로는배꼽둘레를대하고숨을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神氣)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하는데, 그것이 현빈일규(玄牝一竅)이며, 그 다음에 태식(胎息)이 되고, 태식에서 주천화후(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결태(結胎)가된다.”([용호비결] 中에서)
조선시대 단학의 중시조(中始祖)
정북창의 학문은 처음에는 유학으로 출발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천문, 지리, 의학 등 잡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말년에 은둔하면서는 도학, 수학, 역학 등과 신선수련법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 없이 모든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고, 제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 또한 손자 대에 가서 대(代)가 끊기어 양자를 받아들인다.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에 두루 통했는데, 삼교(三敎)를 평하기를“유학은 인륜, 불·선은 견성(見性)과 명심(明心)을 주로 하여 셋은 다르지만 불·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허목의「북창선생행적」中에서)고 했다.
정북창에게 스승이 없었다는 기록은 조선의 도가열전(道家列傳)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조금 달라진다. 이 책에는 그가 말년에‘승(僧) 대주(大珠)’에게 도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의 선맥(仙脈)을 살펴보면, 조선조에 와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도가의 맥(脈)이 김시습에 의해 다시 계승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졌던‘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진면 모는 오히려‘도인(道人)’과‘생불(生佛)’에 가깝다. 이율곡이 쓴『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이 죽은 지 3년 후 절 옆에 묻힌 그의 시신 관 뚜껑을 열어보고 불승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시신이 썩지 않았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생불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김시습을 시조로 조선의 선도(仙道)는‘김시습→정희량→대주(승려)→정북창, 정작’으로 이어지는데, 정북창은 조선시대 선도에서‘단학의 중시조(中始祖)’또는‘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정북창의 도력과 기국
정북창은 앞일을 예견했고, 역술(易術)과 수학에 능통하여 사후 수십년 후까지도 궁중에서 그의 천재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1595년, 선조와 이항복, 정경세 등이 별전(別殿)에서『주역』‘건괘(乾卦)’를 강론한 자리에서“북창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 타인의 마음을 읽는 도술)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거론되었다. 그리고 1601년에도 궁중 별전에서『주역』을 강론하다가‘수학에 정통한 인물’로 화제가 미치자, “북창은 서경덕에 못지않게 수학에 뛰어났으며, 모든 일에 있어 앞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거론되었다.
그는 1659년 노봉서원에 봉안되었다.
정북창은 정통유학자라기보다는 신선수련법을 행했던 도가적 인물에 가까웠기에, 그에 관해 신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총명함이 남달랐던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신명(神明)과도 통할 수 있었다. 가까이는 다른 집의 방안에서부터 멀리는 이민족의 풍속과 기질까지 다 알았으며, 개 짖는 소리며 백로 울음소리 등도 귀신처럼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가 산속에서 살 적에 새와 짐승소리를 모두 알아듣고는“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북창의 이러한 모습은『증산도 도전』에 어린 소녀 김호연 성도가 신안이 열려 사물의 모습을 훤히 꿰뚫어 보고 짐승의 소리를 모두 알아듣는 광경과 유사하다.
“호연이 수도 공부를 하매 신안(神眼)이 열려서 보니 다른 집의 방 안 광경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제사 지내는 모습, 청소하는 모습, 내외가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 등이 마치 곁에서 보는 듯 세세하게 보이더라.
또 구릿골에 사람이 오면 주머니에 돈이 얼마 든 것, ‘내놓을까 말까.’하며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이 다 보이고 까치, 까마귀 등 새가 날아와‘내 일 어디서 누가 오는데 이러저러하다.’고 일러 주는 것을 다 알아들으니 모르는 것이 없더라. (道典3:150:1∼4)
또 한 번은 정북창의 절친한 친구가 중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부친이 와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정북창은 친구의 천명이 다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3대 독자인 아들을 꼭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아무 날 저녁에 아무 산에 올라가면 산 위에서 푸른 도포와 노란 도포를 입은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을 테니, 바둑이 끝날 무렵에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지성으로 권하며 사연을 고하면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이리하여 정북창은 노인들을 통해 자신의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친구의 수명을 이어주었다는 신비한 일화도 전해진다.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하면 3일 만에 생각한 것을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아맞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예견했던, 그야말로 뛰어난 도인이었던 용호대사 정북창! 산속에서 도반들과 함께 산과 호수, 계곡을 거닐며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신선술을 연마했던 정북창은‘자만(自挽)’이란 시(詩)를 남기며 4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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